반계 윤웅렬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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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계 윤웅렬 별장은 독립운동가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조선 말기 무신인 윤웅렬이 1906년 초 창의문 밖 경승지에 지은 별장이다. 처음에는 서양식 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윤웅렬 사후 윤치창이 상속받아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층 벽돌조 건물과 한옥을 포함한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별장은 근대 건축 양식과 서울 한옥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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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윤웅렬 별장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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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2호인 반계 윤웅렬 별장은 대한제국 시기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 성홍열을 피해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이다.[1] 1905년 6월에 착수해 1906년 3월 이전에 완공되었으며, 2층 벽돌조 양풍 양식으로 지어졌다.[1] 1911년 윤웅렬 사후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했다.[1]
2. 1. 건립 배경
1905년 6월에 착수해 1906년 3월 이전에 완공된 반계 윤웅렬 별장은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반계(磻溪) 윤웅렬(1840년~1911년)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을 피해 지내기 위해 조성한 별장이다.[1] 윤웅렬은 도성 밖 경승지로 첫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2층 벽돌조 양풍 양식으로 별장을 지었다.[1]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 셋째 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했다.[1]2. 2. 윤웅렬 가문의 별장
조선 말기 무신이자 대한제국의 정치인 윤웅렬이 1906년 초, 창의문 밖 경승지의 땅을 매입하여 지은 별장이다.[1] 성홍열(猩紅熱, scarletfever)을 피해 지내기 위해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이었으나, 윤웅렬 사후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1]2. 3. 명칭 변경
문화재청의 중요민속자료 지정명칭 부여기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1977년 지정 당시 '일곽'이라는 불확정 개념으로 고시되었고 최초 조성되고 유적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2층 벽돌조 양풍 건물이 사실상 '일곽'에서 제외되었던 것을 바로잡아 문화재 지정명칭을 <부암동 윤응렬대감가(付岩洞 尹應烈大監家)>에서 <반계 윤웅렬 별서(磻溪 尹雄烈 別墅)>로 변경하였다. 아울러 문화재 지정대상도 2층 벽돌조 양풍 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추가 조성된 한옥까지를 포함, 총 3동으로 명시하였다.[1]3. 건축 양식
반계 윤웅렬 별장은 한옥과 서양식 건물이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1906년 초, 윤웅렬이 창의문 밖 경승지에 지은 별장으로,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었으나 나중에 윤치창이 상속받으면서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했다.
3. 1. 서양식 건물
반계 윤웅렬 별장은 도성 밖의 인왕산 북쪽 계곡에 세워진 별장으로서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 건축 양식이 주택에 적용되었다.3. 2. 한옥 건물
이 집은 경사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향하여 자리잡았다. 넓은 정원을 지나면 전면 높은 석축 위에 행랑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3. 2. 1. 안채
안채는 사랑채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대문간을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서울·경기지방의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하여 'ㄷ'자형 평면에 가깝게 구성되었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2칸 크기의 안방이 위치하였고, 안방 왼쪽으로 정면 2칸 크기의 대청과 1칸 건넌방이 차례로 있다.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는 각각 1칸 크기의 부엌과 찬방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에는 세살덧문을 달았고 그 안에 유리분합문을 달았다.대청·안방·부엌·찬방 앞에는 'ㄱ'자로 이어지며 좁은 널마루를 깐 쪽마루가 놓였다. 건넌방 앞에는 세살덧문을 단 누마루 반 칸이 앞으로 돌출되었고, 이 곳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건넌방 앞에 누마루를 둔 것은 대한제국 시기 전통가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3. 2. 2.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ㄷ'자형 평면을 하였는데, 한옥 뒷부분에 자리한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이 별서 건물군(建物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다.3. 2. 3. 행랑채
대문간이 있는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1칸 대문간 좌우로 각각 방 2칸이 있다. 막돌쌓기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아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架構)는 3량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ㄷ'자형 평면을 하였는데, 한옥 뒷부분에 자리한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이 별서 건물군(建物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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